2021년 7월 31일 새벽 예배

찬송: 새 384장 (통 43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본문 말씀: 로마서 10장 1절에서 13절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의 말씀

어제 금요 새벽 가정 예배 시에 묵상한 말씀은 우리의 열심은 우리의 의와 공로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감격으로 주의 영광을 위한 열심에 관한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기서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구원을 율법을 지킴으로,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구성하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 합니다.

일본이나 여러 신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합니다. 현재 자기들이 믿는 신들과 또 다른 신으로 믿는 것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일본인들에게 “예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예 믿죠!”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럼 다른 신들을 거부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면 “그건 못하겠는요!”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많은 신을 믿고 싶지 오직 예수님만 진정한 신으로 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주이시고, 예수님만이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가 절대적으로 생명을 드리고 충성해야 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시인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믿는 것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입니다.

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절)

말과 마음이 다를 수 있습니다. 마음으론 싫어하면서 겉으로는 좋다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말해야 진심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본문의 9절과 10절 말씀에서 “입으로 시인하라”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입으로 시인하란 말씀을 공적으로 시인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은 많은 사람 앞에서 나의 믿음으로 공적으로 시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당시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공적으로 시인하는 것은 큰 손실과 핍박과 심지어 순교까지도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이 따랐습니다. 당시 주라고 여겨진 대상은 로마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공적으로 시인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핍박을 받고 또 순교를 당했습니까?

지금 한국의 여러교회에서 공적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기 운동을 벌이고 있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각계 계층 사람이 모인 어느 모임에 참석했는데 서로에 종교, 서로 믿는 것을 나누는 시간인데 그곳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모였는데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감추고 말하지 않고 말해도 아주 소극적으로 밝히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서 떳떳하게 예수가 “주”이심과 그리스도인임으로 고백하는 운동을 벌이게 되었답니다.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그리스도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면 어느 정도 손해나 핍박을 두려워함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의 삶이 받혀주지 못하니까 부끄러워서도 이유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의가 아닙니다. 율법을 다 지키는 열심으로 얻는 의도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율법을 지키는 데만 열심을 내니 그 열심히 자신과 남에게 큰 걸림돌이 된 겁니다.

주위에 많은 이단들을 보면 그들의 특징은 열심입니다. 여호와증인이나, 신천지, 유광수 다락방, 몰몬교 등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광신적인 열심입니다. 그 광적인 열심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열심 자체만 가지고 평가해선 안 됩니다. 열심이 진리 안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른 지식을 따르는 열심이냐가 중요합니다. 열심이 있다고 진리가 아닙니다. 물론 진리 안에는 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이 있다고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열심이 성경적인 열심이냐는 겁니다. 기독교는 열심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만이 바른 절대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더욱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참 진리를 발견한 자에게 어찌 열심이 없을 수 가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열심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자기 아들을 대신 죽게 하심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구원받은 우리의 삶에 어찌 열심이 없을 수 가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알고도 열심을 내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열심과 잘못된 열심을 구별하는 영안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열심은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 예수님 때문에 내는 열심입니다. 진젠도르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는 오직 한 가지 열심이 있다. 그 열심은 예수님,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다.”

만약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열심히 최고의 열심이 라면 그런 열심은 빨리 꺼버려야 합니다. 나의 의를 위한 열심만큼 백해무익의 열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나는 열심이 있했는 데 나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럼 분통이 터집니다.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 때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어차피 예수님을 위해 일 한것이기 때문에 마음은 아프지만 참고 일어섭니다. 그러나 자기 의를 위해, 자기의 공로의식을 주장하면 나를 알아주지 못한 것에 큰 시험을 받습니다. 그리고 원망을 하면서 하던 일을 멈춥니다. 그래서 사람은 시험이 올 때, 고난이 올 때 알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목사이며 찬송가 작가인 보너(Bonar Horotius 1808-1889)가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이제 천사가 보너의 신앙열심을 저울질한 후 1백 파운드 된다고 하면서 그 열심을 분석해 보여주었다. 이기심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 14파운드였습니다. 그리고 파당적인 열심 15파운드, 명예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 22파운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내는 열심 22파운드이었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은 26파운드뿐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보너는 자신의 열심이 얼마나 인간적인 발상에서 우러난 것인가를 깊이 회개한 후 변화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선한 목자 교우 여러분, 성경적인 열심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독생자를 대신 죽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내는 열심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한 열심입니다. 내 직분 때문에, 내 의 때문에가 아닌 오직 예수님 때문에 내는 열심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열심은 더 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깝지 않은, 영원히 손해 보지 않는, 낭비가 없는 열심입니다

기도

-나의 의와 공로를 위한 열심이 아닌 오직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를 향한 열심을 내게 하소서.
-올해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능력과 평안과 소망과 감사를 누리기 위해 속히 대면예배와 온라인 생방송 예배와 새벽 가정예배와 금요 가정 예배에 주력하게 하소서
-코로나 전염병이 속히 종식되고 교회 모임과, 일터가 회복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선한목자 교우들을 지켜주소서.
-교회의 영적 리더들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선교사님들의 건강과 가정과 사역을 지켜주소서.
-우리의 2세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하시고 이를 위해 부모님과 교회가 합력하여 말씀과 예배와 신앙과 기도에 본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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