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8일 새벽 예배

찬송: 새 393장 (통 447장) “오 신실하신 주”

본문 말씀: 이사야 1장 1절에서 20절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7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8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오늘의 말씀

어제 수요일 새벽 가정 예배에 이어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태도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선 짐승도 그 주인을 알고 그 주인에게 배은망덕하지 않는데 내가 자식같이 양육한 선민 이스라엘이 4절 말씀에서, “나의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며 만홀히 여기며 멀리하며 물러갔도다”라고 슬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의 11절 말씀부터 보시면 그런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는 그러니까 예배는 꾸준히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제사를 받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이시냐면 11절에선,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너희의 재물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절 말씀에선,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절에선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를, 예배를 받으시려고 정하신 제사법이고 제물인데 왜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그렇게까지 싫어하셨을까요? 아까 언급한 대로 하나님을 자기들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 밖에서,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본이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는 우상들을, 돈을, 명예를, 인기를, 사람 등을 의지하고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쳐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를 더더욱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예배가 당시 이교도들이 자기들의 우상들에게 예배하던 것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가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가증한 것은 이방신들에게 바치는 예물이었습니다. 당시 이교도들은 성전 밖에서의, 평상시의 삶에선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과는 전혀 관계없는, 교제가 없는 살다가, 온갖 죄를 다 범하다가 단지 우상에게 잘 보이려고, 우상에게 화를 당하지 않으려고, 복 받으려고 우상에게 제사를, 제물을 드리러 나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가 그러했습니다. 자기들의 삶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온갖 죄를 다 범하다가, 하나님과 우상들을, 다른 것들을 짬뽕으로 의지하고 살다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들이 주인 된 삶을 살다가 하나님도 그저 다른 우상들처럼 자기들에게 복 주실 것을 기대하고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그들의 그런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실 수가 있는가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예배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예배자의 예배이지 그런 예배자가 없는 그저 형식적인, 종교 의식적인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런 형식화 된 예배, 가증한 예배 행위를 가졌던 이스라엘 백성들만 책망할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 또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형식에 얽매여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요? 찬양을 드리는데 뜨거운 마음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마지못해 드리진 않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예배란 형식만 갖추었지 하나님을 주인 삼아 살아가는 순종의 삶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18절과 20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타까워하시면서, 한탄하시면서 말씀하신 겁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선 하나님을 주인 삼지 않고 온갖 범죄를 일삼고, 이방인들처럼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고 섬기고, 하나님께 전혀 순종하지 않고 그저 예배 형식만 갖추면서 하나님께 복 받기만을 기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는 겁니다. 너희가 나에게 나아와 자복하고 회개하면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이,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가 즐겨 내게 순종하면 이 땅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여 배반하면 이방인의 칼에 삼켜진다는 겁니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시의 한복판에는 특별한 비석이 하나 있습니다. “보비”라는 개를 추모하며 세워진 유명한 충견비(忠犬碑)입니다. 오래전에 에든버러에 살던 한 귀족이 바비라는 개를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개를 끌고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그 귀족은 사랑하는 개와 함께 산책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 개를 개집에다 매어 놓습니다. 그때부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포피는 매일 아침 주인이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렸고, 나오는 주인을 볼 때면 반가움으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즐거운 산책하러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나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발로 문을 긁어도 주인은 안 나왔습니다. 포피가 집 주변을 맴돌았지만, 주인의 거동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약 30분이 지났을 때 차 한 대가 집 앞에서 서더니 가방을 든 의사가 내려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바비는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알고 문이 열리는 순간에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의 방으로 갔습니다. 의사는 주인을 진찰한 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가 사망했다고 했습니다. 바비는 주인의 침대 옆을 떠나지 않으며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장례식이 거행될 때, 사람들이 말렸으나 바비는 막무가내로 장례 행렬을 따라서 교회의 묘지까지 갔습니다. 집례하는 목사도 그 개를 막을 길이 없어서 그대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지에서 하관식을 거행할 때, 바비는 슬피 짖으며 무덤 속으로 주인의 관을 따라서 뛰어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개를 간신히 꺼내고 매장을 마쳤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 사람들은 다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어도 바비는 그 무덤을 떠나지 않고 슬픈 표정으로 그 옆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사흘 후에 유가족들이 와서 보니 개가 거기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개를 끌고 가려고 하였으나 결사적으로 버티고 따라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조금 남겨주고는 그냥 갔습니다. 한 달 후에 갔을 때도 바비가 거기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거기에다 개집을 하나 만들어 주었습니다.
바비는 그렇게 1년, 2년, 3년, 7년 변함없이 주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10년, 13년이 지나도 여전히 주인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14년이 되던 해에, 바비는 주인의 무덤 옆에 쓰러져 죽은 것입니다.

이런 바비에 대한 이야기가 에든버러의 모든 시민에게 알려졌습니다. 바비의 죽음이 전해진 수 시민들은 회의를 통해서 비석 위에다 바비의 모습을 동상으로 새겨서 충견비를 세우기로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공원에 세웠는데 지금은 에든버러 시내의 한복판에 그 주인이 운영했던 상점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바비의 동상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개만도 못한 사람이 돼선 안 되고 그저 개만 한 사람이 되자!”

저는 바비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 한 마리의 비천한 짐승도 자기를 사랑해 준 주인에게 그렇게 죽도록 충성을 했는데 주의 종이라고 하는 나는 과연 자기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 예수께 어떤 충성을 바치며 살고 있는가?”

사랑하는 선한 목자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는, “인생의 주인”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선 짐승을 비유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슬프다. 나의 백성이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내가 자식처럼 양육한 너희는 나를 거역하였도다!” 바라옵기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늘 모시고 그분께 충성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오직 하나님만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믿고 주께 충성하게 하소서!
-올해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능력과 평안과 소망과 감사를 누리기 위해 속히 대면예배와 온라인 생방송 예배와 새벽 가정예배와 금요 가정 예배에 주력하게 하소서
-코로나 전염병이 속히 종식되고 교회 모임과, 일터가 회복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선한목자 교우들을 지켜주소서.
-교회의 영적 리더들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선교사님들의 건강과 가정과 사역을 지켜주소서.
-우리의 2세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하시고 이를 위해 부모님과 교회가 합력하여 말씀과 예배와 신앙과 기도에 본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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