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일 새벽 예배

본문 말씀: 디모데후서 1장 6절에서 11절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본문의 6절 말씀에서 바울사도는 디모데가 안수 받았을 때 받았던 은사가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제가 본교회와 타교회에서 안수를 받는 목사님들과 집사님들과 장로님들에게 항상 권면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안수 받을 때의 그 심정, 그 마음, 그 열정을 주님 오실 때까지 간직하시라는 권면합니다. 우리가 안수 받을 때 얼마나 마음에 남다른 심정과 열정과 겸손과 의지 등등으로 충만합니까? 바로 그 상태를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여러모로 힘들어하고, 두려워하고, 의기소침해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디모데가 안수 받았을 때 주께로부터 받은 은사 곧 주께로부터 받은 열정과 사랑과 영적 능력을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해 디모데를 기도와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도 예수님께선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왜냐면 우리 신앙의 원동력이 하나님의 은사, 선물 곧 나를 구원하신 사랑,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은혜, 나를 주의 일꾼으로 불러주신 은혜와 감격했던 구원의 첫사랑, 십자가의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열심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이사야 9장 7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일, 그리스도로 구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얼마나 크냐면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죽이시기까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에게 성도가 열심을 내는 것은 지극히 정상 적이고, 하나님께 열심을 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인 겁니다. 로마서 12장 11절 말씀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그래서 우리 성도는 디모데를 향한 사도바울의 권면처럼 날마다 내가 안수 받을 때에, 내가 구원받을 때,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사와 감격과 열정과 헌신과 열심히 불일 듯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나중에 가서 후회하는 것이 주를 향한 우리의 열심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안수 받을 때, 구원 받을 때의 은사가, 열심이, 사랑이, 감사가 불일 듯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사도바울은 여러 가지 일로, 상황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오늘도 혹시 무슨 일로, 어떤 상황으로, 미래에 대한 일로 두려워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염려”라는 단어도 없고, “두려움”이란 단어도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에게는 염려도 두려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염려도 두려움도 다 사라집니다. 하나님 계시지 않았던 우리의 마음은 두려움이 지배했던 마음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떠나갔을 때 아담이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맘에 다시 찾아 오신 후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뭡니까? “왜 두려워하였느냐?” “내니 두려워마라!” “내가 지금 너희와 함께 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의 7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 그러니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 등등 이런 마음이 언제부터 우리에게 시작되었습니까? 바로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였을 때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능력을 받고”,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성령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사랑과 절제 또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이것이니 그 첫 번째 열매나 사랑이고 아홉 번째 열매가 절제인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이지 사랑과 절제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 절제가 없으면 얼마나 큰 낭패를 보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은 바로 성령으로 만 가능합니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내가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내 한계로 인해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을, 심지어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 힘으로 절제할 수 없는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인 절제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의 7절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을 때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 지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함이 일어납니다. 그 비겁했던, 그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까? 바로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럼 모든 두려움과 염려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8절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성령과 복음으로 인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능히 어떤 고난 속에서도 이겨내게 하십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다른 모든 사도들도 성령의 능력으로 고난을 이겨낸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의 고난의 특성을 볼 때 그들이 원하지 않으면 안 받아도 될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면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지 않아도 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예수님을 이끌어가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시면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어”라는 기록이 많습니다. 사실 제자들과 바울도 원하면 순교 당하는 고난을 안 받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 자랑 다 버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능히 그들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 견딜 수 있게,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구원받게 하시고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데 있어서 고난에 동참하고, 고난을 잘 견디고, 승리하도록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과 주님 가신 길을 간다는 것은 사실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른 찬송의 내용처럼, “예수 나를 오라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우리가 주를 따라 가는 길이 항상 형통이고, 항상 편한 길입니까? 고난의 길입니다. 오해 받는 길, 핍박 받는 길, 욕도 얻어먹는 길, 멸시 천대도 받는 길, 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종종 부르는 찬송 가운데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다!” 저는 참 그 찬송 부를 때 두렵습니다. 그게 얼마나 엄청난 내용입니까? 과연 그 내용을 우리가 알고나 부르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능히 그 길을 가게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바로 그 일을 위해, 그 길을 위해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우리가 주를 위해 받는 현재의 고난을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원받은 축복과 은혜 다음으로 큰 은혜와 축복이 바로 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이 너무 값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본문의 8절 말씀처럼 계속해서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바로 9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8절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부르심입니다)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내가 주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게 되는 것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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