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3일 새벽예배

본문 말씀: 요한복음 13장 1절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다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지난달과 이 번 달에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보내면서 우리는 어버이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한 자녀가 쓴 글입니다. 제목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몸은 절대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아는 여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불러와 비싼 음식 앞에서는 빨리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주머니에는 늘 돈이 넉넉히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 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 당신의 자식이었을 때는 미처 몰랐더랍니다.
당신이 그랬듯, 나도 이제 당신처럼 내 자식의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제야 알아차린 당신의 가슴과 그 눈물을 가슴에 담고 당신의 사랑이 무척 그리운 이 시간에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지켜보시는 고마운 두 분께 외쳐봅니다.
“사랑합니다! 내 어머니, 아버지!”

이 글의 내용은 바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 바로 철저하게 자식을 위한 삶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가장 많이 닮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바로 전 날 밤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겐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 나라로 다시 올라가 실 날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제자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 앞에 우리 예수님의 마음도 몹시 아프셨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우리 1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오늘 설교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소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삼 년 동안 따라다닌 수 십 명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 자기 자녀들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선 자기사람들 곧 자기 자녀들, 자기 백성들, 자기 양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라고 했을 때 우리의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왜냐면 우리가 언제부터의 예수님의 자기 자녀가 됐느냐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절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신니라!” 거기서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창세전부터 계신 분이시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러니까 주님께선 창세전에, 이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여러분을 자기 사람들로 택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여러분을 무조건 적인 사랑과 애정과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자기 사람, 자기 자녀로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 저 천국에 가는 순간까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관심과 애정은 식어짐이 없을 것입니다.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어느 부모님이 자기의 자녀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겠습니까? 바로 주님께서 자기 자녀인 우리를 절대로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와 항상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자기 자녀인 우리를 영원히 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한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의미심장한 말은 “세상”이란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선 그 세상에 있는 여러분을 사랑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도 영접하지도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9장 39절에선,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죄로 타락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합니다. 죄로 가득한 세상, 죄에 오염 된 세상을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세상이 이 지경일 수 가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더 핑크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지만 죄는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셨지만 인간의 죄가 들어와서 바로 지금의 “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의 죄로 망쳐놓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 그 죄로 물든 세상, 죄로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죄인들인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죄로 타락한 세상에서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들을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이 말씀은 세상에 있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주님께서 다 용서해 주시기 위해, 다 덮어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해는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 덮어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속량이란 말은 예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덮어주셨다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시는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가롯 유다의 더러운 발까지 씻어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같으면 여러분을 팔아넘기려고 하는, 배은망덕한, 배반자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선 그런 배신자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하면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어도 끝까지 “자식”을 감싸고도는 게 우리 부모님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자식은 무조건 덮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뜨겁기 때문에 자식의 잘 못이 다 덮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의 자식의 허물은 크게 보이더라도 자기 자식의 허물은 작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 된 우리들도 부모님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의 잘 못들을, 허물들을 평생 덮어주시면서 사셨습니다. 부모님들도 연세가 드시면 자연적인 현상으로 연약해 지면서 어린아이처럼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의 허물을 덮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평생 덮어주셨던 부모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이제 우리가 덮어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교회 안의 형제 자매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서로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래서 우리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예수님의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나의 형제자매란 사실을 알 때에 어리석게 서로의 허물을 들춰내지 않습니다. 저 천국에서도 영원히 함께 살게 될 내 가족이니까 덮어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서로 덮어주고 이해해주고, 믿어주고, 참아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말씀에서 깨달아야 할 말씀은 “끝까지 사랑하신다”라는 겁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의 이 “끝까지”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까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위해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여 주신 하나님을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반역했고, 배반했고, 등을 돌렸고, 죄를 범하였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끝까지..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시고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모진 고통을 다 당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것만은 영원히 기억해야만 합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희생과 사랑입니다. 죄인인 나를 살리시기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입니다.

부모 된 우리는 자녀를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우리의 자녀를 대신 죽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우리는 그 일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기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여러분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쏟아 부어지는 우리의 죄에 대한 진노를, 심판을, 저주를 자기가 지붕이 되셔서 다 막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이것만은 기억하여라. 기념하여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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