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0일 새벽 예배

본문 말씀: 마태복음 26장 36절에서 46절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오늘은 고난주간의 금요일입니다. 구약의 초점과 준비와 예언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입니다. 그 전 날 밤 예수님께선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겟세마네 동산입니까? 누가복음 22장 39절을 보시면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러니까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이 습관 적으로 가신 곳임을 알 수 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 겟세마네 동산을 습관적으로 가셨을까요? 지금 본문말씀처럼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지 우리처럼 기도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선 참 인간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늘 기도하시는 삶을 사신 겁니다.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신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기도의 본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습관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 예수님…, 참 인간으로서 기도를 습관화 시킨 예수님…, 기도로서 살아가신 예수님…, 그렇다면 우리 죄인인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인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를 많이 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기도를 습관화시킨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선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지게 되실 십자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당시 흉악한 죄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한 로마의 철학자는 십자가는 인간이 만든 가장 처참하고, 흉악하고, 고통스럽고 저주스러운 사형틀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자기들이 압제하고 있는 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날 경우 그 중에 한 사람만 십자가에 못 박으면 폭동이 그칠 정도의 무서운 사형 틀이었다고 합니다. 한 의학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죽는 순간까지의 육체적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해서 쓴 글을 읽었는데 그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차마 읽을 수 가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만이 아닙니다. 역사책에 보니까 당시 로마인들이 사용한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들이나 흉악범들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완전히 벌거벗은 몸으로 매달려 있게 했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알고 지냈던 목사님 한 분은 성화를 잘 그리는 분인데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역사 그대로 하위를 가리지 않은 채 실제로 그려보려고 했는데 너무 손이 떨려서 차마 그리질 못하고 결국 예수님의 하위를 가리고 그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사람들 앞에서 정신적으로 온갖 치욕과 모욕을 느끼게 만드는 형틀이죠.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고통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아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십니다. 참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죄를 모르고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죄인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죄인의 취급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흉하고, 무섭고, 더럽고, 저주스런 죄를 주님 홀로 다 짊어지신 겁니다. 여러분,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 지 아십니까?

얼마 전에 미국에서 결국 사형언도를 받게 된 한 남자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사람의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크면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을 끊는 사형언도를 내렸겠습니까? 여러분, 죄의 무게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데 죄를 모르시고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 그 죄의 무게가 가져다주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여러분, 죄인인 인간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는 그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 가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의 고통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하나님께 절규하셨던 내용…, 저는 그 때
예수님의 그 절규가 최고 고통의 절규였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어떤 절규의 내용이었습니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러분, 죄의 가장 크고 무서운 심판은 하나님에게 버림받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영원한 비극이고, 심판이고, 저주입니다. 그런데 성삼위 하나님의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하나님과 한 번도 그 하나 된 관계, 교제에서 격리 된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 무서운 죄를 다 짊어지시는 가운데 죄가 가져다주는 바로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저주와 심판을 예수님이 다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창조한 사람들도 주인 되신 예수님을 버리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마저도 예수님을 버리고, 그런데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 마저도 예수님을 버리는 고통을 경험하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고통…, 여러분, 우리는 사실 다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그저, 죄로 인해 버림받은 나를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할 수 있도록 대신 버림을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에 그저 매일같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 할 뿐입니다.

여러분, 제가 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고통을 전하고 있는 겁니까? 바로 본문의 38절 말씀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습니까? 37절에선 예수님이,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절에선,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 때문에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는데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은 십자가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고통이 어떠한지를 모른다면 지금 예수님이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란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가 있겠습니까? 그런 저주의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주님 기도하러 가신 거예요. 여러분, 나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십자가의 사랑…, 그걸 모르고 기도를 안다고 하지 마세요. 그걸 모르고 기도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걸 모르고 기도의 원리를 가르치려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절실하게 가르쳐 주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그 기도의 원리의 배경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의 희생과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여러분이 절대로 소홀히 여겨서 안 될 것이, 절대로 쉬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기도란 겁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고통의 잔을 받아드리시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이 고난주간을 특별히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비상사태를 기도로 승리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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