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2일 새벽 예배

찬송: 새 370장 (옛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본문 말씀: 누가복음 12장 22절에서 30절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설교

어제 월요일 새벽에 내려주신 본문말씀에서 깨달은 것 바로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버지가 우리를 너무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고 그 때 제자들에게 이 염려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하늘을 날고 있었던 까마귀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여기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까마귀는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새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까마귀는 농사도 짓지 않고, 골방이나 창고도 없습니다. 그래도 까마귀들은 염려가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보살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봐라, 이렇게 하찮은 까마귀도 하나님이 보살피시는데 너희는 얼마나 더 귀하겠느냐?

우리 교회 주위에 특히 새벽에는 까마귀들이 많이 날아듭니다. 어느 날 아침에 제가 어떤 문제로 기도했는데도 부끄럽게도 제 마음에 염려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기도를 마치고 잠시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예배당밖으로 나갔는데 교회 주위에 까마귀 떼가 몰려와 있었고 제 계산으론 한 100마리는 족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까마귀는 하나님이 얼마나 잘 먹이셨는지 까만 털에 윤기가 흐르고 살도 통통합니다. 그 때 마음속에 염려를 가지고 있던 저에게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합창하면서 그 까마귀들이 저에게 마치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보시오 김목사, 하나님께서 하찮은 우리도 이렇게 먹이고 마시게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소중한 당신을 돌봐 주실 것이 당연한데 왜 염려합니까?

저는 그 때 까마귀에게 한 방(?) 먹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까마귀가 저희 교회 주위에 날아와 앉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면 까마귀가 저를 볼 때마다 까악 거리면서, “알고 있지? 나를 봐! 염려하지 마 까악!”하고 Remind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까마귀보다는 믿음이 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28절에서도 예수님께선 들에 피는 풀을 비유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강조하십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하찮은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너희는 들풀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 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가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겨주시는가? 자기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기까지입니다. 로마서 5장 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하게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성경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께서 다른 것도 함께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십자가를 볼 때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에 대하여 절대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29절과 30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의 삶의 방법이라고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하나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염려는 당연한 삶의 한 부분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염려하고 있을 때 우리 의식의 밑바탕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내 삶의 대한 계획을 가지시고 나를 돌보시며,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염려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28절 끝 부분에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염려거리가 찾아 올 때 그 것을 어떻게 다루는가? 바로 그 순간이이 내 신앙의 진면목을 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나는 불신자처럼 여전히 염려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그 염려거리를 아버지께 맡겨버리는가?

우리가 매일 같이 하루를 시작하면서 자동차 핸들을 붙잡듯이 날마다 두 개의 핸들이 있다고 합니다. 염려의 핸들과 믿음의 핸들입니다. 그리고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염려의 핸들을 붙잡을 것인가? 아니면 믿음의 핸들을 붙잡을 것인가? 만약 염려의 핸들을 붙잡으면 그 날 하루가 계속해서 염려의 지배를 받게 되고 염려에 끌려감으로 마음에 평안과 만족과 기쁨과 감사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핸들은 붙잡으면 믿음의 지배를 받음으로 모든 염려거리들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함과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돌보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믿으신다면 염려의 핸들이 아닌 믿음의 핸들을 붙잡아야 되지 않을까요?

한 평생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그 믿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신앙의 기적과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던, 영국의 위대한 성자, 기도의 성자인 조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다. 그러나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 오늘도 선택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당면한 염려거리들 앞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처럼 염려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의 사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염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사전에는 “염려‘가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고, 8월 15일 한국이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한 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부터 염려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까지는 자식에 대한 염려, 생업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노후에 대한 염려, 죽음에 대한 염려, 대인 관계에 대한 염려 등등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부터는 그 모든 염려에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염려를 자기에게 맡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볼 때 해결되는 조짐이 안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합력해 선을 이루어가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괜히 쓸데없이 염려한 셈이 됩니다. 우리 한번 모든 염려에서 해방된 것에, “만세”한 번 외쳐 볼까요? 저는 정말 외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본문말씀의 3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선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면 누구의 나라를 말합니까? 하나님의 나라이죠.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해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영생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의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이 세상에서 백세를 사는 사람이 부럽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시시합니다. 아니 영생을 소유한 자에게 백세를 산 사람이 부러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해서 더 이상 질병도, 고통도, 죽음이 없는 완전한 몸으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적으로 우리보다 더 건강한 사람을 볼 때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육신의 건강이란 것이 서로가 이 땅에서 잠깐 사는 동안에 갖고 있는 차이일 뿐이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한 몸으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볼 때 사람이 자랑하는 건강이, 젊음이 얼마나 시시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세상 사람들의 넉넉한 소유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속한 하나님의 나라를 볼 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와 물질이 얼마나 시시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상속받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 얼마나 풍성합니까? 이 세상의 것들로 비교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부럽게 여기는 신분이나 명예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속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우리의 위치와 신분은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통치하게 되는 위치요 신분인데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부러워하는 반짝이는 권력이, 명예가, 인기가 얼마나 시시한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세상 사람들이 중요시하고, 추구하고,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시시하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본문 말씀의 15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의 이 세상의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 탐심을 물리쳐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의 풍성함과, 우리의 영혼의 만족은 절대로 이 세상의 소유, 권력, 돈, 명예, 인기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물이, 건강이, 명예가, 인기 등등이 아무리 넉넉해도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그런 것들로 만족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풍성함은, 영혼의 만족은, 오직 우리가 속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는 자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세상 사람들이 연연하고 염려하는 돈, 건강, 명예, 인기 등등에 감사와 기쁨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우리들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돈이 있어도 감사, 없어도 감사입니다. 건강이 좋아도 감사 안 좋아도 감사입니다. 오래 살아도 감사, 짧게 살아도 감사입니다. 내가 속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볼 때 정말 세상 사람들이 연연하고 염려하는 것이 다 시시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선한 목자 교우 여러분!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여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배짱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평안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 환희, 놀라운 삶의 감격이 있습니다.

기도 제목

-주 안에서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삶을 살아가는만큼 모든 염려에서 해방 된 삶을 살게 하소서.
-올해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능력과 평안과 소망과 감사를 누리기 위해 속히 대면예배가 시작되기까지 온라인 생방송 예배와 새벽 가정예배와 금요 가정 예배에 주력하게 하소서
-코로나 전염병이 속히 종식되고 교회 모임과, 일터가 회복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선한목자 교우들을 지켜주소서.
-교회의 영적 리더들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선교사님들의 건강과 가정과 사역을 지켜주소서.
-우리의 2세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하시고 이를 위해 부모님과 교회가 합력하여 말씀과 예배와 신앙과 기도에 본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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