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9일 새벽 예배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 25절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감해야 할 날이 확실하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개인의 종말입니다. 나의 병으로, 사고로, 노환 등으로 죽고 이 세상을 떠날 날입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날입니다. 그 다음은 역사의 종말입니다. 바로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역사를 시작하시고 마감하시는 역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의 역사는 막을 내립니다.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성숙한 어른의 차이가 많은 데 그 중의 하나가 생일을 맞이할 때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생일을 당할 때 자기가 몇 살 되었다고 신이 나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한 살 더 먹은 나이를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은 생일을 당할 때 한 살 더 계산해서 자기가 몇 살이 되었다는 것보다 앞으로 자기에게 남은 세월을 계산하면서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설계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생일을 당할 때마다 내가 인생을 마감하는 날을,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을 계산해 보면서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설교 제목이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입니다. 본문의 25절 끝부분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의 종말과 심판을 가져올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날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자입니다. 22절 끝부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했는데 원래 원어 적 의미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자”입니다. 본문의 19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구약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제사장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잘 못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대제사장도 죽습니다. 그러니 지성소에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구약의 대제사장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에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는 것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준비는 반드시 짐승이 피를 흘려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소 뜰 앞에 있는 번제단에서 짐승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럼 짐승이 대제사장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리고 번제단에서 불에 타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려진 다음에 대제사장은 자기의 죄 사함을 받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드려진 짐승의 제물은 완전한 제물이 아닙니다. 더 완전하고 영원한 희생 제물을 가리키는 모형이고 그림자일 뿐입니다. 짐승의 피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할 수 있는 희생 제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단 번에 영원히 드려진 완전한 희생 제물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의 19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장부터 9장 까지 더 나은, 완전한 예수님의 희생 제물을 열거한 다음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소 곧 지성소에,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들어갈, 나아갈 담력을 얻은 것입니다. 또한 본문의 20절 말씀에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구약의 성소 안에는 휘장 약 10cm 두께의 커튼이 있는데 바로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을 때 당시의 성소가 진동하면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욱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를 막고 있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20절 말씀은 그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육체가 채찍에 맞아 찢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리고,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흘리시고 죽으셨을 때 그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이, 그 대속의 죽음이, 예수님의 희생 제물 되심이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은혜로, 그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완전히, 영원히 열어놓으셨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는 참 믿음으로 담력을 얻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피로 오늘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더 가지시기 바랍니다.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의 힘이고, 기업이고, 방패이고, 상급입니다. 복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재림 날을 바라보며 “ 소망을 굳게 잡자!”입니다.

본문의 23절 말씀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하나님께선 반드시 당신이 약속하신대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의 구원과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약속 받은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통치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내용들이 수만 가지가 됩니다.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약속,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신다는 약속,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 무슨 일을 당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약속,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신다는 약속,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해 주신다는 약속,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약속, 우리를 도와주시겠다는 약속 등등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그 모든 약속대로 과거에도 행하셨고, 지금 행하시고 계시고 그리고 내일도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망을 어제 오늘 영원히 동일하신 주님의 약속 안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확고부동한 이유는 주님은 어제 오늘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소망 곧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소망은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시면 믿음의 선진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의 선진들의 특징은 나그네로 지나가는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에서,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있는 것이라!” 믿음의 선진들을 더 나은 본향 곧 천국을 사모하였기, 천국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이 풍파 많은 거친 광야 세상을 지나가면서 믿음을 잃지 않고, 인내하면서 천국의 소망으로 능히 모든 것을 이기며 살아갈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영생복락의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이 잠시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가면서 겪는 시련과 고통들이 비록 힘들지만 능히 이길 수 있는 것들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잠시 지나가는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가면서 우리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급을 위해 믿음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주를 위해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다시 오는 날의 가까움을 볼수록 “서로 격려하자”입니다.

본문의 24절 말씀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우리는 일주일 동안 많은 문제에 시달립니다. 죄와 유혹과의 싸움에서 여러 가지 죄책감에서, 내 집안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직장에서, 고용주와 고용인 간에 발생하는 문제에 시달립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코로나 펜데믹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럼 쉽게 힘을 잃게 되고 낙심이 됩니다. 이 때 교회 공동체가 가장 힘써야 할 일이, “서로 격려하는 일”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예수님께서는 격려의 삶을 사셨습니다. 억눌린 자들, 가난한 자들, 소외 된 자들, 무능한 자들, 낙담한 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닮아가는 사람은 격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기러기 이야기입니다. 기러기들이 V 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비행기 망원경으로 추적한 조류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첫째, 기러기는 혼자 나는 것보다 떼를 지어 날 때 71%나 더 오래 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혼자서 천국 가는 날까지 잘 날아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선 함께 날아가라고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함께 날면 오래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러기가 V 자 대형으로 나는 것은 공기대가 형성되어 뒤따르는 기러기들이 날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뒤에 있는 동료를 조금이라도 편히 날게 하기 위하여 V 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앞에서 나는 인도자격인 기러기가 가장 빨리 지칩니다. 이것을 아는 기러기들은 가끔 위치를 바꿉니다. 기러기들은 철저하게 공동체 중심 적입니다. 이 것이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항상 남을 배려해야 합니다. 남을 섬겨줘야 합니다. 남이 지쳐 보이면 내가 도와줘야 합니다. 함께 날 수 있도록 내가 항상 보조를 맞춰줘야 합니다.

셋째, 기러기들은 날면서 계속 웁니다. 기러기들이 날면서 우는 것은 힘들어 지르는 비명이 아닙니다. 기러기들이 날면서 우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자기의 위치를 알림으로써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서로 격려하는 나팔 소리와 같은.것입니다.

넷째, 만일 기러기 한 마리가 아프거나 부상으로 함께 여행을 계속하지 못하게 될 경우 반드시 서너 마리의 동료 기러기가 낙오자와 함께 더불어 머물러 줍니다. 그리고 낙오자가 좀 나아지면 같이 다시 하늘로 비상하는 겁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이 기러기보다는 더 나아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지금의 코로나 펜데믹을 지나가는 우리 몸 된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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