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군 목사님 인터뷰1

웹사이트팀은 김창군 목사님을 서면 인터뷰 했습니다. 진솔한 김 목사님의 답변에서 많은 은혜 받으시길 바랍니다.

1. 목사님 부임 후 목사님의 팬을 자처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먼저 저희 교회에 부임 후 약 한 달 동안의 소감을 말씀해 주시지요

벌써 제가 부임해 온지 한 달이 지났군요. 저는 토랜스 선한목자교회에 오기전에 일찍이 외부에서 토랜스 선한목자교회를 바라보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먼저 담임 김현수 목사님의 깊은 영성 가운데 나타나는 인품 목사와 섬김 그리고 말씀 중심의 메시지에 대한 칭찬의 소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섬겼던 교회 담임 목사님도 김현수 목사님과 선한목자교회에 대한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 역시 건강한 교회, 따뜻한 교회, 주님이 높임을 받는 교회, 생명을 낳는 교회에 부임해 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Kevin Woo 목사님과 전화로 대화를 나누다 저의 앞으로 계획을 나누었을 때, 지금 선한목자교회에서 부목사님을 청빙할려고 한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Woo 목사님의 주선으로 김현수 목사님을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 김목사님의 인품과 목회 철학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일주일 정도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음에 결정하고 김현수 목사님과 다시 한 번 더 만남을 갖고 선한목자교회에 함께 할 것을 약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1월14일 주일이 저의 첫걸음이었습니다. 행정과 찬양을 주된 사역으로 시작된 저의 시작은 이미 저를 맞이하기 준비된 성도들과 사역들이 저를 반가이 환영하는 따뜻함이었습니다. 우리 선한목자교회 장점이자 강점은 모든 성도의 관계를 가족이라는 구조속에서 서로 섬기며 사랑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아직 전체 목장을 다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제가 6목장과 2목장의 모임을 참석하면서 느낀 점이 바로 초대교회와 같이 서로 떡을 떼고 나누며 자신의 것을 공계하며 섬기는 모습이 너무 보기 아름다웠습니다. 이미 섬기는 데 체질화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2. 목사님 가족 관계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데 가능하시면 간단한 설명과 사진을 소개해 주실 수 있는지요.

가족 관계를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허락하신 사랑스럽고 귀한 가족이 있습니다. 먼저 사랑하는 아내 (김현자 사모)는 늘 저의 성장을 위해 야당의 시각으로 평가하며 충고해 줍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셋입니다. 첫째는, 딸 (김혜주, Gloria)은 지금 4th Grade (10살)입니다. 둘째, 아들 (김상범, Paul)은 지금 2nd Grade (8살)입니다. 그리고 막내 아들 (김상우, David)은 지금 3살박이입니다.

3. 목사님이 제일 좋아하는 찬양곡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제가 좋아하는 찬양은 너무나도 많습니다만… 그 중에 한곡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4.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소개해 주시지요.

저는 내적 부르심을 미국에서 받았습니다. 제가 1993년도에 미국 시카고에 어학 연수차 들어와서 대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유학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그 대학이 미션스쿨이었기에 캠퍼스에 채플에 가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기숙사를 나와 누나 집에 머물면서 토플시험을 준비하였고 누님과 사돈 어른들이 다니시는 시카고 제일 연합감리교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등록한 그 시기에 그 교회에 두나미스 선교 찬양팀이 발족되면서 제가 그 팀에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부터 훈련시키신 찬양과 예배 사역의 장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팀원을 영적으로 이끌수 있는 영역을 허락하셔서 팀원들과 말씀과 기도로 찬양팀의 영성을 세워 나갔습니다.
그 해 겨울, 저는 주로 공부를 누나 집 지하실에서 했습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와 찬양 연습 역시 그리고 토플 준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유학생활을 하면서 늘 한쪽 마음 구석에는 내가 유학 들어온 목적이 무엇인가? 공부하러 왔다는데…부모님의 기대가 있는데…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들 속에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사역들에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저는 스스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역을 회피하려고 하였고 주변 가족들 역시 “너무 과하게 교회에서 활동한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고 권면하기도 하였습니다.
1993년 11월 어느날 제가 새벽 2시쯤에 저의 미래를 위해 교회를 위해, 찬양팀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여러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는 데 기도하는 가운데 저에게 선교지를 배경으로 한 내용과 방치되어 있는 어린 아이들과 사람들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의 우릴 향한 그 크신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다시 한번 더 가슴 깊이 느끼게 하시면서 저의 안에 있는 모든 여러 모양의 죄악들을 토해 내는 회개의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저의 기도 제목과 상관없이 성령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주재하셨습니다. 콧물 눈물로 바닥을 딩굴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시간을 갸졌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예수님의 세 번의 걸친 질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 답변 이후에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저에게도 세상에 방황하는 사람들을 품게 하시며 헌신을 요청하셨습니다. 저는 그 기도시간이 끝나자마자 한참 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왜냫면 전혀 제가 그러한 기도를 할 생각도 계획도 없었는 데, 한 시간 반을 그렇게 기도하게 하셨으니까요. 그 날 이후에는 토요일 일찍이 저를 깨우셔서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시카고 제일연합감리교회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메시지를 듣게 하시며 계속적으로 모든 상황이 또한 저의 사역이 그 모든 일이 가능할 수 있는 환경으로 조성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때마다 저는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까?’라는 걱정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가 미국 온 목적이 공부였기에 이를 근거로 삼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 없는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고 오하이오의 톨리도에 있는 University of Toledo의 화학공학과로 편입했습니다. 도피처로 숨은 것이지요. 누나 가족들, 그리고 교회 성도들, 특별히 두나 미스 선교 찬양팀원들과의 아쉬운 이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를 끝내면 한국에 돌아가서 아버지를 도우면서 좋은 아들과 평신도 사역자로 섬길 것을 마음에 다짐하고 톨리도로 향했지요. 저의 연약함을 제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또 세상의 그 수 많은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은데 제가 감히 그 중에 설 수 있겠느냐는 두려움이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한편으론 육신의 아버지(고 김봉식 장로님)께 못다한 효도를 하고 싶기도 했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계셨거든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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