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과 찬양]양화진, 그리고 나의 묘비
























[지혜의 아침―박상은] 양화진, 그리고 나의 묘비





얼마 전 병원 식구들과 함께 양화진 외국인묘지공원을 다녀왔다. 몇 차례 가보긴 했지만 나이가 조금 더 든 탓인지 감회가 새로웠다. 양화진에는 100여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묻혀 있다. 120여년 전, 아직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그 황량한 조선 땅에, 북미와 유럽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젊은 나이에 와서 복음과 사랑을 전하다 이곳에 묻힌 수많은 선교사들을 생각해본다.

일본 식민지 하에서 조선의 억울함을 온 세계에 알렸던 헐버트 선교사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왜 그는 영국 귀족들이 묻히는 영광스러운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이 척박한 한국 땅에 묻히기를 더 원했던 것일까.

1883년에 태어나 1907년 스물넷의 꽃다운 나이에 먼 이국땅에 처녀의 몸으로 와 단지 8개월 사역을 감당하다 이 땅에 묻힌 루비 켄드릭양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만일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 모든 것을 한국에 주겠노라.”

배재학당과 정동감리교회를 세운 헨리 아펜젤러, 그는 1902년 목포 앞바다에서 전복된 배에서 소녀를 구하다가 익사해 시신마저 인양되지 못한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그 외에도 경신학교와 새문안교회를 세운 언더우드, 삼대가 이 땅에 사역하다 묻힌 윌리엄 홀, 로제타 홀, 셔우드 홀, 그리고 그들의 3세 된 딸 이디스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 땅에서 사역하다 묻힌 선교사들, 그 자녀들….

나는 묘지를 거닐며 나의 무덤 비석에 새겨질 글귀를 생각해보았다. 나의 후손들은 나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아니, 그보다 하나님께서 과연 나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선교사들의 묘비를 응시하며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만일 나를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면, 내가 주님을 위해 드리는 어떠한 희생도 크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던 선교사님의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고귀한 피를 흘린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왜 그들은 황폐한 땅, 눈물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찾았는가.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아프간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 아프간 영혼을 품으시는 주님의 사랑, 그들을 향해 흘리신 주님의 눈물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 양화진 선교사들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처럼, 분명 아프간 영혼을 위해서도 거룩한 희생이 필요했으리라.

주님께서 날 위해 죽으셨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비록 내가 멀리 선교지로 나아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보냄받은 이곳을 땅 끝이라 여기며 내 곁에 있는 환우들과 이웃들에게 이 놀라운 사랑을 전하리라 다시금 다짐해본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누군가 이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대가를 치렀기 때문일 것이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이 여름 끝날, 이 땅에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삶을 불사르신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와 사랑의 고백을 드리고 싶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박상은(샘병원 의료원장· 누가회 이사장)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