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30일 새벽 예배

찬송: 새 383장 (통 43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본문 말씀: 로마서 10장 1절에서 13절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의 말씀

오늘 본문 말씀에선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그들의 잘 못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의 2절 말씀에서,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아마 사도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제일 먼저 자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는 예수 믿는 자를 잡아서 가두고 심지어 해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고 잘못 된 열심이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지적하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 명분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심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실 누구든지 열심히 없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또 열심히 없는 사람을 누가 주의 일꾼으로서 인정하겠습니까? 만약 우리에게 열심히 없다면, 마음이 미지근하다면 사실이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불 꺼진 엔진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듯이 열심 없는 신앙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위기, 사역자의 위기는 열심히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열심”이라고 해서 다 건전한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열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가히 극성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열심에는 독소가 숨어 있었습니다. 본문의 2, 3절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열심이 나쁜 이유는 그 열심히 올바른 지식을 좇지 않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그러니까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의롭게 되고 영원히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 시대에서 정말 율법대로 살아보려고 부단히 씨름 했던 수많은 신자들을 통해 아주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으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아도 구약에서 경건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많이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자기 한계성을 하나님께 시인한 겁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이런 구약 시대의 경건한 신자들의 겸손함을 본 받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자기들이 노력해서 열심을 내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는 잘 못 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자기 의만 내세웁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니까 사도바울이 예수 믿기 전처럼 자기들처럼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비판합니다. 더 나아가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큰소리를 친 것입니다.

“열심”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데 자기 의를 내세우는 열심히 되면 자기처럼 열심을 내지 못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남을 쉽게 판단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르고 자기 공로의식으로 교만해지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가 율법으로 돌아가면 자기 것을 주장하게 됩니다.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남을 심판하기 시작합니다.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겸손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기도가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위기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통해서 계속 듣는 것은, “율법으로 돌아가지 마라! 네가 은혜로 구원받지 않았느냐?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느냐? 감사해라! 기도해라! 감격해라! 순종해라! 겸손해라!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것이다!”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두 가지 싸움 앞에 부딪힙니다. 하나님의 의냐, 내 의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느냐,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느냐 하는 싸움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제 본문의 4절을 보시면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잘 못 된 열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여기서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주님이 대신 지키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가 지키지 못해서 꼭 받아야 될 율법의 형벌을 주님이 대신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행하신 일로 얻으신 의를 공짜로, 은혜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으로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인 일입니까?

사랑하는 선한 목자 교우 여러분! 우리 성도의 삶은 주를 향한 열심히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히 나의 의를 드러내고, 남을 판단하고, 나의 구원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독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의 열심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직 주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주의 일에 열심을 내야할 것입니다.

기도

-나의 의와 공로를 위한 열심이 아닌 오직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를 향한 열심을 내게 하소서.
-올해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능력과 평안과 소망과 감사를 누리기 위해 속히 대면예배와 온라인 생방송 예배와 새벽 가정예배와 금요 가정 예배에 주력하게 하소서
-코로나 전염병이 속히 종식되고 교회 모임과, 일터가 회복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선한목자 교우들을 지켜주소서.
-교회의 영적 리더들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선교사님들의 건강과 가정과 사역을 지켜주소서.
-우리의 2세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하시고 이를 위해 부모님과 교회가 합력하여 말씀과 예배와 신앙과 기도에 본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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