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0일 새벽 예배

토랜스선한목자교회 새벽가정 새벽예배

찬송: 새 304장 (통 4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본문 말씀: 창세기 15장 15절에서 21절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오늘의 말씀

오늘 본문 말씀은 창세기의 마지막 장인 동시에 요셉의 마지막 날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시면,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라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17세 때에 무서운 질투와 미움으로 친 동생인 요셉을 죽이려 했고 이집트의 노예로 팔아넘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45장을 보시면,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은 그런 형들을 확실하게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세월이 흘렀는데도 형들은 자기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죄에 대하여 계속해서 마음의 두려움과 속박 감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저지른 죄를 진심으로 애통하며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저지른 일이 얼마나 처절하고 안타까운 여운을 남길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우리 마음을 속박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면 요셉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야곱이 살아있을 때는 요셉이 자기 아버지 때문에 자기들에게 복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이 죽었으니 자기들이 지은 죄를 요셉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죽자마자 형들이 요셉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야곱을 빙자해서 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형들은 아버지의 말이라면 잘 따라주는 요셉이 비록 자기들이 공모해서 꾸며낸 말이지만 요셉이 아버지의 말대로 자기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겁니다. 그리고 17절 끝부분에 보면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하셨다는 아버지의 말을 형들로부터 들은 요셉이 “울었더라” 라고 말했습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정도가 아니라 엉엉 흐느껴 울었다는 겁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엄처난 일을 저지른 형들을 이집트의 치리자로서가 아니라 한 아버지의 피를 함께 나눈 형제로서 형들을 이미 용서를 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런 요셉을 자기들의 형제로 받아주지 않고 계속해서 이집트의 치리자로 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형제로 보지 않고 자기들을 언제든지 벌할 수 있다는 사람으로만 보고 있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고 운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과 외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큰 차이를 봅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 했고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계속 형제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형제가 아닌 계속해서 자기들에게 해를 줄 수 있는 이집트의 치리 자와 외인으로만 봅니다.

우리에겐 가정이란 공동체가 있고, 교회란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 두 공동체의 특성은 바로 형제의식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가정은 혈육관계로 구성된 식구, 형제들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나 보호 본능이 강합니다. 그래서 내 식구, 내 자녀라면 서로가 무조건 적으로 덮어주는 본능이 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내 가정, 혈육의 약점을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내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혈육의 피보다 더 강한, 영원한 예수님의 피로 한 몸 된 형제자매가 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입니다.

빌레몬서에 보시면 빌레몬이란 사람의 집에서 오네시모란 노예가 도망칩니다. 당시 노예가 도망치면 주인을 배반한 사형감입니다. 그런데 그 오네시모가 사도바울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그 오네시모를 전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편지를 쓴 겁니다. 오네시모도 우리처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으니 그를 종으로 받지 말고 사랑하는 형제로 받으라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주 안에서 형제입니다. 저 천국에서도 영원한 형제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교우들 모두를 형제로 보고 보지 못하는 데는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성경은 교회 공동체 안에는 자녀가 아닌 사람이 없고, 형제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 예수님의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들이란 겁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는, 받아주는, 하나가 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바로 형제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도 세상적인 기준이 들어왔습니다. 형제로서의 하나 된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적인 것 즉 같은 학교, 같은 취미로 하나가 되려고 합니다. 같은 직분, 같은 수준으로 하나가 되려 합니다. 같은 출신, 오랜 멤버로 하나가 되려 합니다. 같은 고향, 오랜 친구, 같은 라이프스타일 등등의 그룹을 형성해서 사람을 편애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천국의 모형으로서 요셉처럼 서로를, 모두를 형제로 받아주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이제 본문의 18절 말씀을 보시면 요셉이 흐느껴 우는 모습을 본 형들은 조금 안심이 됐는지 요셉 앞에 엎드리면서,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라고 하면서 동생으로서의 요셉이 아닌 자기들을 죽일 수 도 있고 살릴 수 도 있는 치리 자로서의 요셉의 눈치를 살펴보는 겁니다. 그런 형들에게 요셉이 대답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 영어론, “Am I in the place of God?” 요셉의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요셉의 신본주의와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보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왜냐면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절대로 형들의 악행을 갚지 않고 용서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내가 원수를 갚는 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 취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너희는 원수를 갚지 말고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명령을 지킴으로서 원수로 인하여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요셉은 이집트의 제 2인자로서, 최고 치리자로서, 자기에게 엄청난 일을 저지른 형들을 능히 판단하고 벌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또 형들은 그런 요셉을 늘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비방하거나 아무 판단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의 먼저는, 원수 같은 일을 저지른 자들일지라도 아버지 야곱의 피를 나눈 친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문의 10절 말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즉 하나님의 자리를 본인이 어찌 가로챌 수 있겠느냐 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에 대한, 그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한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우리도 교회와 가정과 사회 공동체에서 형제와 이웃을 비방하고 판단함으로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즉 하나님의 자리를 가로채는 일이 없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올해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능력과 평안과 소망과 감사를 누리기 위해 속히 대면예배와 온라인 생방송 예배와 새벽 가정예배와 금요 가정 예배에 주력하게 하소서
-코로나 전염병이 속히 종식되고 교회 모임과, 일터가 회복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선한목자 교우들을 지켜주소서.
-교회의 영적 리더들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선교사님들의 건강과 가정과 사역을 지켜주소서.
-우리의 2세들이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하시고 이를 위해 부모님과 교회가 합력하여 말씀과 예배와 신앙과 기도에 본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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