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5일 새벽 예배

본문 말씀: 요나서 4장 1절에서 11절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저는 개인적으로 요나서 4장을 좋아합니다. 요나서 3장에서 요나가 훌륭하게, 위대하게, 담대하게 악독한 니느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12만이 넘는 백성들이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아오게 되는 곧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역사상 이례적인 부흥을 가져오는 것으로 끝났다면 어쩌면 우리에겐 큰 도전이나 위안을 받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이어지는 요나서 4장, 그리고 거기에서 보이는 요나의 모습이 어찌 그리 연약할 수가 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선지자란 사람이, 신앙인이 그럴 수 있을까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런 나에게도 도전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인 요나서 4장 1절을 보겠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의문점은 요나서 3장 끝 절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니느웨 성읍 백성들이 다 회개하고 죄악 된 길에서 돌아왔는데 왜 곧바로 이어지는 4장 1절에선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로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럼 왜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가 받아드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입니다.

요나서 3장에서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외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40일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가 돌아올 수 있는 40일의 은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달랐습니다. 요나가 원했던 것은 40일 지나면 자기 백성들을 괴롭히던 니느웨 백성들이 멸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40일이 지났는데도 자기가 선포한 데로 멸망 당하 긴커녕 성읍이 나무 평안한 것입니다. 성 안 길거리마다 죽은 시체들로 인해 통곡소리가 들려야 되는데 오히려 웃음소리가 가득합니다. 죄악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합니다. 행복한 도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니느웨를 용서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노하고 언제 하나님에게 성이 날까요? 혹시 우리도 요나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보다 내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이 안 될 때 더 하나님께 노하고 성을 내지는 않을까요? 요나는 기뻐하고 감사하는 일에 있어서도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보다 자기의 기쁨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와 우리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밤 땀이 피가 되 떨어질 정도로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추하고 더럽고 흉악한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져야 될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그 고통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도 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고 사셨고 이 번에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아버지의 기쁨이라면 십자가의 죽음도 받아드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자존심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능욕과, 저주와,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본문의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받아드릴 수 없는 요나가 매우 성이 나서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지금 요나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았으니 죽여 달라고 협박합니다. 이건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닙니까? 아니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엄청납니까? 자기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선지자로 삼아주셨고, 그 것도 당시 선지자가 불순종하면 큰 죄임에도 불순종한 자기를 하나님은 물고기를 통하여 구원을 주셨고, 물고기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게 한 이방인들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니까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못 견디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일로, 어떤 사람으로 심지어 하나님으로 인해 성이 나고 섭섭해 할 때 주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있을 때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받은 은혜는 기억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다 누구누구 때문에, 무엇무엇 때문에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6절 말씀에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과는 정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고,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고,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전혀 몰라주고 반항하는 요나를 위해 사막의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시원한 그늘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말없이 박 넝쿨을 준비해 주십니다.

사막의 그 이글거리는 태양 볕 아래 초막에서 니느웨가 속히 망하기를 지켜보고 있는 요나를 하나님은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며 박 넝쿨은 준비해 주셔서 요나의 머리를 시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보면 하나님이 박 넝쿨을 준비해 주신 것은 단지 시원한 그늘을 만드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요나에게 귀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함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본문말씀의 6절 끝부분에서 “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심히 기뻐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1절에선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라고 말했는데 지금 여기서는, “요나가 심히 기뻐하였더니”라고 말했습니다. 요나서 전체를 통해서 요나가 이처럼 기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니느웨 성읍 안에 사는 12만이 넘는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도 기뻐하기는커녕 매우 싫어하고 성을 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는 고작 박 넝쿨로 인하여 심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박넝쿨은 그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불편한 뿐이지 우리 삶의 핵심도 절대적인 것도 아님에도 요나는 그 것으로 인해 “심히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살기 좋은 환경이 되고, 자기 몸과 마음이 편해지니까 심히 기뻐했습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영혼이 잘 되는 일이 여러분의 기쁨이 아니라 지금 내가 힘들고 불편하고 이런 어려운 일들이 없어지고, 우리가 무언가 원하는 것을 받았을 때 우리가 요나처럼 심히 크게 기뻐하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하나님이 이 박넝쿨을 통해서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요나에게 큰 기쁨이 되었던 것은 니느웨의 구원도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구원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나를 편하게 해 주는 환경, 나를 만족하게 해 주는 상황이 요나가 심히 크게 기뻐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요나의 이 기쁨의 수준이 우리 기쁨의 수준은 아닐까요? 자기에게 편하면 좋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면 기쁘고 등등이 우리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본문말씀의 7절을 보시면 우리는 요나가 너무 기뻐하는 박 넝쿨을 없애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8절에선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박 넝쿨의 그늘이 없어진 고로 강렬한 해가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다”라고 또 원망합니다. 박 넝쿨이 시들어 그늘이 없어지므로 괴로워하며 성을 내고 있는 요나에게 9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래서 요나가 어떻게 대답했어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결국 하나님이 요나에게 던지신 도전은 뭐가 중요한가의 대한 도전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도전하시는 것도 똑같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영혼이 중요하냐? 박 넝쿨이 중요하냐? 하나님이 중요하냐? 박 넝쿨이 중요하냐? 너의 감정이 중요하냐? 너의 생각이 중요하냐? 아니면 내 뜻과 내 나라와 내 계획이 중요하냐? 지금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요나야! 그 박 넝쿨이 그렇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게 아니다” 하면서 니느웨 백성들의 12만 명의 영혼을 요나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요나가 중요시 했고 가치 있게 여겼던 박 넝쿨과 비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0절과 11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박 넝쿨이 없어짐으로 성내고 있는 요나에게 “너는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을 그렇게 아꼈거든 내가 니느웨 곧 이 큰 성읍에 있는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었던 12만 명을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하나님은 하루살이 같은 박 넝쿨에 가치를 두고 기뻐하고 있었던 요나에게 니느웨의 12 만 명의 영혼의 영원한 가치를 비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로 하여금 자기가 무엇에 기뻐했고 무엇에 가치를 뒀는가를 딱 보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한목자 교우 여러분! 지금의 펜데믹 기간에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했던 것이 박 넝쿨이 아니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이전이 박넝쿨에 대한 기쁨이었다면 이제는 오직 주님과 그의 기쁨과 관심과 교회와 나라를 기뻐하시고, 가치 있게 여기시고, 하나님이 아끼시는 모든 영혼 심지어 그 사람이 내가 싫어하고, 원수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아끼시기에 우리도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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