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0일 새벽예배

본문 말씀: 잠언 28편1절에서 11절

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2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3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5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6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7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8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9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10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느니라
11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의인과 악인의 삶”

오늘 본문 말씀에서 솔로몬은 악인과 의인의 삶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1절에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여기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악인은 외적인 환경이 평안해 보여도, 쫓아오는 자가 없는데도 늘 쫓기는 삶을 산다는 겁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항상 불안 해 하는 삶이란 것입니다.

죄책감 때문에 항상 형벌을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항상 불안 해 합니다. 한국에서 정치인들, 갑부들, 서민들 할 것 없이 점쟁이들을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악인은 하나님을 제외한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 영혼이 평안할 수 가없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 영혼은 늘 공허하고 만족이 없는 영혼입니다. 항상 죄에 눌려 있고, 억압되어 있는 영혼이 어찌 평안 할 수 가 있겠습니까? 매일 매일이 두려움이고, 불안하고, 쫓기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솔로몬 시대 때 사자는 용맹함과 담대함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니 “의인의 담대함이 사자 같다”는 것은 최고의, 완전한 담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1절에서 “담대하다”란 동사는 “확신이 있다” “신뢰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의인의 담대함이 자기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사자와 같이 용감할 수 있는 이유는 창조주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담대함이 무엇입니까?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것입니까?”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어떤 긍정적인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까? 자기에게 최면을 걸 듯 이 마음과 생각과 말로 자기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진정한 담대함의 주체는 내가 아닙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죄의 정죄에서부터 담대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는 성경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러분,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겁니까? 우리의 행위입니까? 우리의 노력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의 의로, 예수의 공로 의지하여 자녀 된 권세로, 양자의 영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 은혜의 보좌로 “아버지!”라 부르며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의로 하나님의 자녀 된, 예수님의 의로 옷 입은 자들은 죄에서부터, 죄책감에서 참 자유를 얻은 자로서 사자 같은 담대함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염려와 두려움에서부터 해방된 자들입니다. 또한 사람은 심리학자인 프로이드가 정의했듯이 평생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면서 사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죽어도 살겠고,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도 사자 같이 담대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란 염려에 쫓기면서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식주에 대하여서도 사자 같이 담대합니다. 왜요? 우리 천부께서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아셔서 채워주셨고 또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를 믿는 믿음으로 주 안에서 모든 염려, 근심, 두려움 다 내려놓으시고 사자 같이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이 담대하지 않으면 누가 담대해야 됩니까?

이제 본문의 4절 말씀부터 보시면 지혜로운 자들의 율법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7절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라고 말했습니다. 9절에서는,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는 가증하니라” 여러분, 구원받은 자가 제일로 중요시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섬기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데 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고, 내 대신 모든 율법을 다 순종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대한 사랑과 감사와 신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서 5장 3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은 무겁지 않습니다. 사랑하니까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1장 25절에서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서 율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율법이 우리를 억압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신호등이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안전과, 보호와 유익을 줍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보호를 주고, 복을 주고, 유익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감사함으로 듣고 또 감사함으로 행합니다. 나에게 복 주고, 자유를 주고, 이생과 내생에서 유익을 주는데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9절 말씀을 보시면,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경건도 헛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율법을 듣고 지키는 삶이 없이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위선이란 것입니다. 율법에 귀를 기울여 그대로 살고자 하는 자의 기도가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는 요술램프처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러 구하면 이루어지는 것이란 거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더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지키기를 힘쓴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지혜로운 삶이고, 복을 누리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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